뉴욕한인수산인협회의 발자취

 

 초대  김상문 회장
                         
           “ 뉴욕지구 어물상인회 태동 ”           

  1977년 12월 맨하탄 뉴-코리아 하우스에서는 뉴욕지구 어물상인회 발기대회가 열렸다. 이를 바탕으로 78년 1월 3일 창립총회를 개최, 초대회장에 김상문씨(작고)를 만장일치로 추대함으로써 실질적인 뉴욕지구 어물상인회가 창립되었다. 발기인으로서는 김준겸, 김상문, 진홍웅, 김수진씨가 참여하였으며, 창립총회에는 김상문, 김준겸, 진홍웅, 아세행, 홍봉표, 심명호, 윤청일, 이정택, 나종식, 손천용, 김상수, 최철희, 진석찬씨 등 총 32명의 회원들이 참석,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태동하게 되었다. 이렇듯 초대회장에 당선된 김상문씨는 백혈병이 발병, 발견된 지 1달 15일 만에 작고 하였다. 작고한 김상문 회장은 동포사회 최초로 수협 단체장으로 치루어 지었고 회원들의 모금과 함께 장지를 한국으로 정하였다. 당시 임원진으로는 부회장 심명호, 총무 김수진, 부총무 나종식, 이사장으로는 김준겸씨가 수고하였다. 

 
2대   김준겸 회장

    이녹우 회원 피살 사건을 계기로 청과상조회와 교류

 창립 1주년을 맞은 뉴욕지구 어물상인회는 2대 회장으로 김준겸씨를 추대하였다. 김회장은 “ 대내외적으로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으나 당시 7차례나 되는 회원 불상사가 발생해  사후대책을 수습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기억된다. ”며 “ 이런 말을 해도 괜챦을 지 모르지만 타 단체에 비해서 모범적으로 협회가 운영되었었다. ” 고 협회원들의 열의에 감사해했다. 당시 주요 사건일지를 살펴보며는 ·박성두, 나종식 회원가게 화재 발생 ·도매상 직원에 의해 피살된 이녹우 회원 치사 사건 ·이녹우 치사 사건에 대해 당시 청과상조회에서의 조의금 전달. 등이 있다. 이녹우씨 피살 사건을 계기로 뉴욕한인사회에서는 단체간의 교류가 최초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대 임원진으로는 부회장 박찬유, 총무 윤청일, 재무부장 홍봉표, 조직부장 김상수, 섭외부장 진홍웅으로 특히 재무부장 홍봉표씨와 섭외부장 진홍웅씨는 수차례에 걸친 사고 대책을 수습하기 위해 절치부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준겸 회장은 한인사회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본국에서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김회장은74년 김상문 초대 회장과 동업해 시작한 생선가게를 76년 독립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으며, 아들 김재덕씨도 수산업에 종사하는 수산 가족으로서 대를 잇는 가업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어 타의 귀감이 되고있다. 김회장은 한국에서 수송전기공고(현 대원고등학교 전신, 조선전기공업)에서 국어과 주임교사로 재직하였었다.

 

3대   박헌달 회장

         “ 회원과 가족위한 야유회 처음 실시

 3대 박헌달 회장은 2대 정기총회에서 추대되었다. 3대때는 협회원이 150명으로 늘어 회원과 회원가족을 위한 ‘하계야유회’를 처음 개최하였다. 이렇듯 회원들이 늘어났다는 것은 수산업에 종사하는 회원들이 많아짐을 의미, 경쟁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도 되었다.
 박회장은 이러한 경쟁에 대해서 꿈과 희망을 가지고 미국에 이민온 우리 한인들이 서로 협조하고 서로 잘사는 방법을 모색하여야만 한인사회가 혼탁하지 않을 텐데 최근들어 본의아니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자제할 것을 강조하였다.
 제1회 ‘코리안 데이 퍼레이드’에도 참가했으며, 맨하탄 명동장에서 열린 송년파티에는 150여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3대 임원 및 이사진으로는 부회장 진홍웅, 총무 김상수, 조직부장 박희돈, 체육부장 정동규, 재무부장 홍봉표, 문화부장 정근조, 섭외부장 송천용, 이사장은 김수진 회원이 맡아 보았다.

 

4대  김수진  회장

    “ 청과협회와 최초의 합동야유회 개최, 연례 합동야유회로 정착 ”

 제4대 회장은 3대 이사장이었던 김수진 협회원이 추대되었다. 회원이 늘어남에 따라 풀톤어시장의 노조 가입 요구가 거세었다. 김회장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뉴욕한인회 관계자들의 입회하에 노조 대표자들을 조치, 공청회도 개최하는 노력도 기울였으나 득별한 대책을 세우진 못했다. 3대때부터 개최되었던 하계야유회가 4대에 이르러서는 당시 양대 직능단체였던 청과협회(회장 최재흥)와 합동야유회를 개최, 한인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송년파티는 시장내 도매상으로부터 도네이션을 받아 높은 호응속에 마칠 수 있었다.
 한편 김회장은 수산업 종사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무작정 수산업에 종사하는 것을 지양하고 경험과 연륜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집행부 및 이사진으로서는 부회장 장성국, 총무 박희돈, 회계 손천용, 서기 정근조, 감사 변윤용, 이정택, 조직부장 전영준, 홍보관리 홍봉표, 섭외부장 소동명, 문예부장 장창운, 체육부장 정동규, 이사장 고영환, 이사 1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5대  장성국 회장

                          “ 수협 심볼 마크 완성. 연말파티 350여명 성황. ”
       
 경선을 통해 당선된 장성국 회장은 경선자였던 오영준씨를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장회장은 사무실을 개설하고 집기를 들여 놓아 협회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편 협회원들도 협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런와중에 협회원 6명의 가게가 화재 등의 사고로 피해를 입자 협회차원의 성금을 모아  그들에게 전달, 협회의 위상을 강화시켰다. 하계야유회때 많은 협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을 이뤘으며, 외부인사로 참석한 미대교수를 통해 박희돈 부회장이 협회 로고를 완성시켰다. 년말파티는 협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유례없는 협회원들의 친목의 계기가 됐으며, 외부인사도 대거 참석 한인사회 연말파티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5대 회장단 및 이사진은 부회장 박희돈, 총무 정동규, 조직부장 이학균, 재무부장 홍봉표, 체육부장 이종일, 섭외부장 이정택, 기획부장 손천용, 이사장 오영준, 이사 정운창, 장낙성, 박행규, 고경화, 임순필, 김장복 등

 

6대   오영준 회장

          사단법인체로 뉴욕시에 정식 등록

오영준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뉴욕한인수산인협회로 협회의 명칭을 변경하고 뉴욕시에 정식으로 사단법인체로 등록을 하였다. 오회장은 5월달 제1회낚시대회를 개최했으며, 회장배 볼링대회도 개최하는 등 스포츠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한편 최초로 청과상조회와 합동 야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회원수도 250여명이나 됐다. 제6대때는 회장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개정했다. 비영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비영리 단체 등록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또한 회원주소록 편찬도 했다. 한인사회가 점차 비대해짐에 의해서 한인사회 골프인구도 증대, 박희돈씨에 의해 수산인골프동호회가 창설됐으며, 당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대한항공 폭파사고로 5대 회장 장성국 회장의 모친상으로 슬픔을 함께하기도 했다.

 

7대  노창호 회장                

           비영리단체로 등록 완료

비교적 젊은층으로 분류됐던 노창호 후보가 무투표 당선됨으로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노회장은 비영리단체로 등록을 완료했으며, 수산인골프회를 중심으로 수산회 장학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제7대는 각종행사에 수많은  인원을 동원함으로써 한인단체 모임에 바람을 일으켰다. 내용을 살펴보며는 볼링대회 5, 6회 대회때 연인원700여명, 85년 하계야유회 1천5백명, 86하계야유회 1천5백명, 송년의 밤 6백여명 참석 등 과거 보기 힘든 협회원들의 참여도를 기록했다. 한편 스포츠 부문으로는 봉황대기 축구대회에 공동 3위, 뉴욕축구협회 주최 뉴욕축구한인리그전에서는 6전 전승을 기록함으로써 수산인 축구동호회의 위력을 발휘했다. 노회장은 ‘ 너와 나의 솔선수범 교포사회 제1단체 ’ 라는 구호아래 한인단체 중 제1의 단체가 되기위해서 노력했다. 한편 회원수가 6백여 회원을 넘어서게 되었다.      

 

8대  신만우 회장

      상가 렌트 안정위해 노력

박찬유 후보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신만우 회장은 정기총회 직전 박찬유 후보가 사퇴함으로써 치열했던 선거전은 신만우 후보가 무투표 당선되었다. 이날 총회에는 2백 50명의 인원이 참석하는 등 선거열기가 고조되었었다. 러닝메이트 이동권씨를 부회장으로 임명하고 이사회에서는 어영갑씨가 투표로 이사장으로 당선되었다. 유난히 사고가 많았던 제8대는 진석찬 회원 조의금, 김치호 회원 부인 조의금, 이석우 회원 화재의연금, 청과상 권동수 권총피습 사망조의금, 모국 수재의연금 등을 전달, 협회원들의 단결을 과시했다. 당시 랜드로드들이 상가렌트 안정법에 반대함으로써 소상인들이 피해를 입자 신만우 회장은 이를 강력히 항의 뉴욕시소비자 보호국의 당초 16% 인상안보다 1.5% 정도 내릴 수 있었다. 집행부, 이사로는 부회장 이동권, 홍봉표, 사무총장 정연송, 이사장 어영갑, 부이사장 최창래, 김정달, 총무이사 김진만, 강성호, 우상경씨 등이다.        

 

9대   이종일 회장

         협회원들의 단합위해 힘써

 이종일 회장은 제7대의 치열한

 

10대   이영규 회장

11대    정동규 회장

             수산인협회 위상확립에 기여

 정동규 회장은 단독 츨마로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역대 회장들의 업적들을 그대로 이어 받고 이러한 응집력을 한인사회에 표출, 수산인협회를 대형 직능단체로 발돋음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회장은 특유의 활발함을 바탕으로 한인사회와의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수산인협회 전통을 이어 하계야유회와 수산인의 밤은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으며, 전직 골프동호회 회장으로서 골프에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장학기금 골프대회도 골프를 통한 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대성황을 이뤘다. 지금도 그와 같은 친화력을 근거로 한국에 나가 새천년 민주당 청년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집행부 이사로는 부회장 김흥한,박동주 재부부장 정세영 이사장 윤순근 감사 홍봉표, 하일보 등이었다.

 

12대   박두현 회장

             새 사무실 입주, 현재까지 사용

 박두현 회장 임기중 사무실이 불의의 화재로 전소되어 새 사무실로 입주하는데 박회장은 온 정력을 쏟았다. 그결과 각계각층의 성금이 답지, 오늘날 사용하는 협회 사무실에 입주할 수 있었다. 특히 사무실 마련 기금모금 골프대회를 개최, 150여명이 참여하는 한인사회 골프대회 사상 드문 진기록을 세웠다. 수입만 3만불을 훨씬 상회, 모금액에 있어서도 타대회를 압도하였다.    
 하계야유회도 협회원들의 단결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한인사회가 소기업 자영업자가 대다수인 관계로 “상가렌트 안정법”은 한인사회의 주현안이었다. 뉴욕한인소기업센타가 앞장서 한인소상인들을 대변하는데 있어서 박두현 회장이 앞장서 한인소상인 단체들을 주도하였다. 협회원들에게 아울러 이를 홍보하기 위해 박회장은 직접 협회원들을 일일이 방문하는 등 회원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임원진으로는 부회장 김성호, 이창주 사무총장 정세영, 정효식 이사장으로는 유지형, 부이사장으로는 강성호, 김정환, 이광휘씨 등이 맡아보았다.  

 

13대   유지형 회장

             풀톤 도매상과의 유대강화
  제13대 회장선거도 치열한 경선을 통해 유지형 후보가 당선되었다. 유지형 후보는 협회원들의 단합을 도모키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유회장은 발빠르게 집행부 및 이사진을   선임하고 협회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었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수산. 청과합동야유회를 부활시켰으며, 협회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특히 풀톤어시장 도매상들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한편 시관계자들과의 잦은 회동을 통해 협회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한편 매년 개최되는 보스톤 씨푸드 쇼를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 같이 참관해 기자들로부터 높은 호응도를 받았다. 또한 김치구 협회원 가게 화재사건에 성금을 모금 전달하는 등 협회원 대소사에 힘을 쏟았다.
당시 임원진으로서는 수석부회장 이창주, 제1부회장 김광호, 사무총장 박병규, 기획실장 박태병, 이사장 박창호, 부이사장 김성호 등이 맡아보았다.
       

14대    이창주 회장

        대외적으로 협회 알리는 데 주력

제14대 회장 선거는 수산인협회 역사상 가장 치열해 3명의 후보가 각축전을 벌인 결과 이창주후보가 간발의 차로 당선되었다. 이렇듯 치열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이창주 회장은 협회원들로부터 역대 보기 드문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추진력을 발휘, 뉴욕시 관계당국에 수산인협회를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협회보를 발행, 협회원들에게 편리를 제공했으며, 역대 집행부에 젊은 협회원을 영입해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역대 회장단들과도 유대를 강화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하였다. 봉사실을 운영, 협회원들의 애로를 해결하는데도 노력하였다. 다소 전반기때의 높은 의욕이 후반기때 차질을 빚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협회의 지명도를 높이능데 일조하였다.
보스톤 씨푸드 쇼 참관, 코리안퍼레이드 참석, 뉴욕시장실에서 경제담당 부시장과의 면담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임원진으로는 수석부회장 박태병, 안전대책위원장 김성호, 사무총장 신용우, 이사장 박대순, 부이사장 이세훈, 나광식, 송병권 등이 수고하였다.